어질게 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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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읽는 책에 좋은 글귀가 있어서 인용해본다.

출처: 살아가는 지혜는 가정에서 배운다.

삶이란 생사의 사이를 말한다. 사람은 그 사이를 그냥 주어진 대로 보내지 않고 부단히 변화시키면서 보내려고 한다.

이러한 욕심이 문화를 이룩하고 역사를 이루었다. 그래서 사람은 여타의 짐승들과는 다른 삶을 성취한다.

하루살이는 비록 하루를 살아도 증손자를 보고 죽음에 이른다는 게다. 그렇다면 하루를 사는 하루살이가 사람보다 더 오래 사는 셈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수를 늘려 증손자를 보게 되는 경우는 별로 흔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시간의 길이로 목숨의 삶을 따질 것은 아니다. 이를 두고 명(命)이라 한다.

사람이 누리는 문화나 역사는 무엇일까? 만일 사람이 왜 사는 가를 묻지 않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지 않는다면 아마도 그것들은 형성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문화나 역사는 인간들이 제시하는 삶의 이유와 방법에 대한 해답에 속한다. 그러한 해답들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는 있지만 언제 어디서나 사람이 왜 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부단히 묻고 답하려는 버릇은 버릴 수 없다.

이것이 인간의 숙명이다.

지금 우리는 '왜 사는냐' 라는 질문에 어떤 해답을 내리고 있을까? 하루에 한 번만이라도 스스로에게 '나는 왜 사는가?' 라고 묻는다면 삶의 낭비는 훨씬 줄어들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남을 위해서 산다는 생각을 갖는다면 도둑도 없어질 것이고, 부정부패도 사라질 것이고, 어지럽고 소란한 세태도 없어질 것이다. 그러면 사람도 어질어지고 세상도 따라서 어질어진다.

그러나 나를 위해 산다는 생각이 강할수록 행동은 경쟁의 생리를 강하게 지니게 마련이다.

남을 이겨야 하는 까닭이다. 현대인은 경쟁의 시대에 산다. 그러한 경쟁이 우리 모두를 위한 경쟁이 아니라 나만을 위한 경쟁이 되면 졸부의 세상이 되기도 하고, 권력을 남용하고 보통 사람들이 억울함을 당하는 세태가 된다. 우리는 지금 그러한 병을 앓고 있는 중이다.

지금 우리는 '어떻게 사는냐' 라는 질문에 대해 어떤 해답을 내리고 있을까? 아마도 저마다 잘살아야 한다는 방향에서 그 해답을 찾고 있을 것이다.

이 세상 어느 누가 못살기를 바라겠는가? 누구나 잘살고 싶은 것이 사람의 본능이다. 이 또한 인간의 숙명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인가? 남이야 죽든 말든 나만 잘살면 된다는 생각은 항상 못된 삶의 수단으로 그치고 만다.

다른 사람들은 못살고 나만 잘살기 위해서는 울담을 높여야 할 것이고 비밀 통장을 감추어야 할 것이다.

훔친 것이 많은 사람이 도둑을 겁내는 법이다. 훔친 것이 없는 사람은 도둑을 무서워 하지 않는다.

도둑질한 것을 훔친 도둑은 부끄러워하지 않고 훔친 것을 도둑맞은 쪽은 도둑을 잡아 달라고 신고하지 못한다. 그래서 어느 도둑이 고관이나 부호의 집을 털면 뒤탈이 없고 보통 사람의 집을 털면 뒤가 시끄럽다고 푸념을 했다는 게다.

부끄럽지만 지금 우리 세태를 보면 도둑질로 얼룩진 꼴들이 여기저기 흉한 흉터처럼 남아 있어 부끄럽고 민망하다. 이는 어질지 못한 탈이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 이렇게 단서를 달아 둘 것 없다. 윗물이 흐릴지라도 아랫물이 맑으면 세상이 버티고, 아랫물이 흐릴지라도 윗물이 맑으면 세상을 건질 수 있는 까닭이다.

위아래가 두루 맑으면 세상은 튼튼해지지만 위아래가 두루 흐리면 세상은 벼랑에 매달린 꼴이 되고 만다.

불과 몇  년 전 우리는 국민총생산 1만 달러 시대가 열렸다고 덜렁거리다 IMF 라는 뒤통수를 얻어맞고 소득은 절반 아래로 절하되고 빚내서 흥청망청했다는 손가락질을 당했다.

왜 그런 흉하고 더러운 꼴을 당했는가? 우리 모두가 어질고 현명하게 살지 못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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